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누에바 칸시온 (문단 편집) == 역사 ==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공화주의자들의 상당수는 [[라틴 아메리카]]로 망명을 떠났고, 이들은 현지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발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는 음악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상업적 음악이 아닌 인민의 음악, 인민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음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남미에서는 민속 음악 붐이 일어났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안 페론]] 정권이 민족음악장려법 등을 제정하여 [[라디오]] 방송에서 의무적으로 일정시간 이상 민속음악을 방송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아타왈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 [[칠레]]에서는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가 각지에서 민요를 수집하며 누에바 칸시온의 기반을 다졌다. [[차랑고]]와 같은 전통 악기들도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비록 70~73년의 짧은 기간동안 좌파 정치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남미는 우파 군사정권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기 때문에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들은 정부의 혹독한 탄압에 시달렸다. 특히 칠레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당시 인티 이이마나와 킬라파윤 두 밴드는 해외 공연중이었고, 칠레에 돌아오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망명, 누에바 칸시온과 안데스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칠레 군사정권 하의 비참한 모습을 알린 것은 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로 칠레가 민주화된 이후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도가 높아지고 민주화된 칠레도 음악가들이 꿈꾼 칠레와는 또 달랐고 누에바 칸시온도 고리타분한 음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판매량이 저조해져 한 동안 한물간 음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가지 사회문제로 시위와 파업이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중남미 특성상 시위현장에서 여전히 애창되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